[6회] 신사임당이 살았던 시대

리채운의 신사임당의 자녀교육법
[6회] 신사임당이 살았던 시대
  • 입력 : 2021. 07.26(월) 10:30
  • 가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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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자녀교육법/CTN] 하늘이 인재를 낳는 것은 본래 일대(一代)에 잘 쓰기 위한 것으로, 그 인재를 낳을 적에 지체 높은 가문의 사람이라고 해서 재질의 부여를 특히 풍부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 미천한 신분의 사람이라고 해서 그 부여를 특히 인색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 허균

 16세기 전기 조선의 풍경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중기까지 결혼을 바탕으로 한 가족문화는 여성의 거주지 중심으로 움직였다.

따라서 신사임당이 오랫동안 친정살이를 한 것은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신사임당(1504-1551)은 조선 왕조 제10대 연산군10년(1504) 10월 29일에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때는 조선왕조가 문을 연지 100년 정도 지난 무렵이었다. 신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 전기는 조선시대 전기에 속한다. 연산군은 폭군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폭정을 펼치기 전까지 조선은 최고의 태평성대를 누리던 무렵이었다.

세종이 닦아놓은 터전에 성종이라는 걸출한 왕이 국가의 기본을 튼튼하게 다져놓은 시기였다.

태종과 세종의 시대에는 개국 초기이고 가뭄이 잦아 흉년도 많이 들어 오히려 민심이 흉흉할 때가 많았으나 성종과 연산군 시대에는 연연이 풍년이 들었고 개국이후 전란도 없어서 조선은 16세기 세계의 어떤 국가보다도 안정적인 나라였었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과 여러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조선 왕조의 지배 질서는 동요·붕괴되어 가는 일대 변화기를 맞이하게 된다.

앞에서 말했지만 당시 조선시대에는 현모양처의 개념이 없었다. 양처(良妻)란 말은 사마천이 <사기>에서 쓰기 시작한 말인데,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신하가 생각나고(國難則思良臣),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생각난다(家貧則思良妻).'라는 말에서 유래 되었다.

당시 조선에는 ‘현모양처’보다는 '열부효부(烈婦孝婦)' 개념만이 있었다. 16세기는 조선왕조가 들어선 지 1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고려의 풍습이 남아 있었고 남성과 여성이 비교적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던 시대였다.

조선 왕조의 지배층은 유가적 사상을 바탕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그들 나름의 이상적인 체제를 수립해나가고 있었으나 당시 백성들의 사고체계는 1000년 이상 이어져온 불교문화에 젖어 있어서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았다.

16세기 중반까지 현실의 의례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결혼풍습은 남자가 혼인 후에 여자의 집에서 생활하는 남귀여가(男歸女家)의 솔서혼(率壻婚) 즉 데릴사위제가 성행했다.

원래 처가살이 풍습은 고구려시대에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서옥제(壻屋制)라고 불렀다.

이는 양쪽 집안이 혼인에 합의하면 신부의 집 뒤뜰에 서옥이라는 별채를 지어 신혼집으로 사용하고, 아이가 장성하면 비로소 남편이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가는 제도였다.

이 같은 풍습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진다.

고려시대에는 처가살이를 '남귀여가혼'이라 불렀는데, 일정 기간 신랑이 처가에 머물러 사는 제도이다. '장가(杖家)'란 말이 장인, 장모의 집이라는 뜻이니, '장가간다'는 말도 여기서 비롯됐다.

사임당의 경우도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강릉 오죽헌에서 처가살이를 했고, 아버지 신명화도 그곳에서 사위로 처가살이를 했으며, 그리하여 신명화는 사위 이원수에게도 처가살이를 권했던 것이다.

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에는 혼인을 하면 처갓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당시 많은 기록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조선왕조 통치의 기틀이 된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재산분배 조항을 보면 적자와 서자는 뚜렷하게 차별을 두지만 아들딸에 대한 재산분배에서는 차별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인 상속제가 자녀균분상속이었다. 장남, 차남, 아들, 딸 구분 없이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노비의 수나 땅의 비옥도의 가치까지 따져서 상속하였다. 여성은 혼인해도 친정 재산을 상속할 수 있었고 제사도 아들딸이 돌아가며 지냈다.

여성이 재산권과 상속권을 잃고 남녀관계가 불평등해진 것은 17세기 중엽 이후였다. 통일신라에서 고려 때까지의 오랜 불교적 전통과 생활 방식이 성리학적 규범으로 바뀌는 것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거친 17세기 이후에야 가능했다.

신사임당의 생애에서 가장 눈 여겨봐야 할 것은 강릉지역에 터전을 둔 외가이다.

이미 오죽헌을 살펴보다 알게 되었지만 신사임당의 외가는 강릉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진 집안이었다.

신사임당이 결혼 후에도 친정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외가의 재력과 현명한 아버지를 두었기 때문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사임당은 혼례를 마친 후에도 남편 이원수와 함께 본가인 강릉에 머물렀다. 신명화가 본가와 처가를 오가며 생활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듯이 이원수도 그 생활을 받아들인듯하다.

언니는 시집을 가서 없었고, 아버지는 한양에 머물고 있었기에 신사임당은 결혼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을 생활을 해나갔다.

말하자면 신사임당의 성취에는 개인의 능력과 의지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친정이라는 자장(磁場) 안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환경이 아주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신사임당은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처녀 때처럼 새벽에 일어나 어머니의 아침상 차리는 일을 돕고, 낮에는 동생들에게 글을 가르쳐야 했다.

아버지와 언니가 없는 집안에서 장녀 역할도 해야 했다. 그러던 것이 아이들을 하나 둘 낳게 되면서 더욱 바쁜 생활로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신사임당은 자기 관리, 자기 수양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글을 읽었고, 낮에는 아이들에게 글공부를 하게 하면서 수를 놓거나 그림을 그리는 자기만의 시간을 가졌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사임당은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졌다는 점이다.

외가의 영향력이 강한 성장 배경은 율곡에게까지 이어진다. 강릉에서 태어난 율곡은 어머니를 사랑했던 것 못지않게 외할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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