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희의 문화산책] 미국 마초 문화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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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희의 문화산책] 미국 마초 문화의 허구
  • 입력 : 2023. 03.13(월) 09:45
  • 정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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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희(시인, 소설가 · 극작가 · 사진작가 · 예술인협동조합 ‘이도의 날개’ 창작공동체 대표 · 세종행복도시필하모니오케스트라 대표)
미국 마초 문화의 뿌리는 19세기 금을 찾아 광활한 서부를 개척했던 미국인들의 프런티어 정신, 카우보이 문화에서 유래했다. 거친 황무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요구됐던 강한 남성상과 큰 덩치를 숭상하는 분위기, 청교도가 가져온 가족 중심 문화, 넓은 땅과 싼 기름값, 안전을 위한 욕구 등이 어울린 결과다. 그래서 픽업 고향은 미국이 되었고 픽업은 가장 미국적인 차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강하고 큰 것을 좋아하는 미국인들은 강하고 투박하며 덩치 큰 마초 성향의 차를 ‘드림카’로 여긴다.

하지만 마초(macho)라는 단어의 어원이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과는 정반대의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애초 스페인어의 ‘마초’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였다. 즉, 어떤 남성이 마초라는 평가를 받으려면, 먼저 ‘용기, 용맹, 명예, 정직, 긍지, 겸손, 책임 같은 품성을 겸비하고, 남들의 존경을 받아야 했다.’ 쉽게 말해 타인의 귀감이 되고 모범이 되는 용감하고 책임감 있는 남성이 마초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대 미국어의 마초는 정반대로 폭력배가 되었다. 본디 라틴 문화에서 마초들은 지역사회에서 남을 괴롭히는 불한당을 해치우기 위해 책임감 있게 나설 용기 있는 남성이었지만, 현대 미국 사회에서 마초들은 여성 폭력이나 성차별 문제에 대해 반대하기보다는, 도리어 이를 긍정하거나 적어도 침묵 또는 방관하고, 그런 문제에 여성들과 목소리를 함께하는 것이 남자답지 못하다며 불쾌해한다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 많은 남성 우월주의적인 남성들이 거친 성미를 드러내거나 여성에게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면서 마초라는 찬사를 받지만, 이제는 그런 남성들은 상남자라고 칭송받는 게 아니라 시급히 치료받아야 할 대상이며 사회와 분리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넬슨 만델라(N.Mandela)는 1997년 전국남성 행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는 남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은 고립되어, 그들 또한 다른 사람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모든 남성이 이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라는 요구를 듣게 될 것이다.’라고.
시간이 좀 흘렀지만, 영화 ‘프라이빗 데저트’는 새로운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다. 다니엘과 사라. 그들은 온라인에서 만났다. 단 둘뿐인 공간. 다니엘에게는 사라와 텍스트를 주고받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라와 갑자기 연락이 끊어진다. 그러자 다니엘은 가상의 공간에서 튀어나와 사라가 사는 곳을 향해 2,000마일을 달려간다. 두 인간이 모든 걸 다 벗어버리고 서로를 원하는 뜨거운 본능만으로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세상은 인간과 인간이 알몸으로 만나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다니엘과 사라를 만나게 한 건 ‘성’이었다. 미지의 세계에 존재하는 성, 그러나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 하는 것 또한 성이다. 젠더들이 갈등하는 성, 말이다.

알리 무리티바 감독의 ‘프라이빗 데저트’는 브라질의 94회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출품작이다. 성 소수자 영화의 클래식 ‘거미여인의 키스(Kiss of the Spider Woman, 1985)’를 연상시킨다. 두 영화 모두 이성애자인 남자 주인공과 트랜스젠더 사이에 펼쳐지는 연민, 사랑, 그리고 섹스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트랜스젠더와 성 소수자에 대한 범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브라질의 남부와 북부의 두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성에 대한 개인의 사유와 자유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 질문들은 사회의 통념에 반하는, 불편하며 부담스럽고 실존적인 질문들이다. 감독은 이성애, 동성애 그리고 양성애라는 에로의 영역 안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아프지만 아름다운 로맨스로 그렸다. 그의 스타일과 서사의 방식은 단순하지만, 영화는 마초형의 남자 다니엘과 유약한 ‘여성’ 사라의 복잡한 캐릭터를 탐구한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구릿빛 근육과 태생적 무뚝뚝함을 장착한 남성 우월주의적인 남성 주인공, 돈과 권력과 세련됨과 냉소 그리고 서늘함을 장착한 도시의 알파 남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내면의 상처라는 예상치 못한 나약함으로 여성의 모성애를 흔드는 베트남이 아니다. 이제 마초 본래의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 ‘남자다움’에 대한 강박에 쫓기며 여성 혐오로 불안을 달래는 한국적 마초에 대해서도 벗어나야 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에서 마초기질 가득한 ‘러셀 크로우’에서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정민준 기자 jil36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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