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희의 문화산책] 흥미진진 서오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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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희의 문화산책] 흥미진진 서오릉 이야기
  • 입력 : 2023. 03.21(화) 10:32
  • 정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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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희(시인, 소설가 · 극작가 · 사진작가 · 예술인협동조합 ‘이도의 날개’ 창작공동체 대표 · 세종행복도시필하모니오케스트라 대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서오릉(西五陵)은 조선의 19대 왕인 숙종의 묘이다. 서오릉은 조선 왕조의 다섯 능 즉 경릉, 창을, 익을, 명을, 홍릉을 일컫는 말이다. 오릉 이외에도 명종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의 순창원이 경내에 있고, 영조 후궁 영빈 이 씨(사도세자의 생모)의 수 경 원이 있으며, 최근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의 대비는 묘도 이곳으로 이장 되었고 2009년 6월 27일에는 조선 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한 나라의 왕릉이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는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일로, 조선 왕릉의 역사적ㆍ문화적 가치를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조선의 19대 왕 숙종을 지금의 언어로 말하자면 금수저 중 금수저라 할 수 있다. 왜냐면 예송논쟁으로 유명한 왕 현종에게서 태어난 조선에서 몇 안 되는 현 왕의 적장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거침없이 세 번의 정권이 바뀌는 경신, 기사, 경술의 환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두 아들에게는 지독한 독이 되었다. 이야기를 풀어보면 후손 없이 죽은 경종이 떠오른다. 장희빈의 아들로 아버지에게 사약을 받고 죽은 엄마를 생각하며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먼저 앞서는 가여운 왕이지 않은가? 이보다 더한 스토리는 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주홍 글씨, 아들에게 너무나도 엄격해 아들을 뒤주에 갇혀 죽게 한 비운의 왕 영조일 것이다.

숙종은 몸이 병약했던 13~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당시 조선은 15세가 되면 성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왕족이면 더 빨리 후사를 보길 바라는 마음에 10세~12세에 조혼을 시켰고 손(孫)이 급하지 않은 일반 집이면 15세 정도에 결혼시켰다. 20세가 되면 이제 완전한 성년으로 보아 아버지도 20살이 된 아들의 집안일에 관여하면 큰 실례로 여겼다. 당시 모후인 명성 황후와 증조모인 장렬왕후가 살아 있어 수렴청정이 가능했지만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어머니의 수렴청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권력을 장악하여 친정(親政)을 했다. 이는 조선 왕조에서 매우 특이한 상황에 해당한다. 숙종은 다혈질이고 냉혹했으며, 장장 46년에 이르는 치세 동안 무수한 환국 정치를 통해 매우 강력한 왕권을 향유한 군주이다. 흔히들 조선 중후반기에는 명성을 가진 군주로 영조와 정조를 많이들 떠올리지만,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군주 중 하나가 숙종이다.

숙종은 왕비를 네 번 들였고, 이 중 두 번째 왕비가 인현왕후 민 씨, 세 번째가 희빈 장씨이다. 집권 기간 정사를 멀리하고 희빈 장씨를 비롯한 많은 여인을 탐닉했던 국왕이라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실제 숙종은 후궁의 수가 다른 조선의 임금에 비해서 적었으며 자식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숙종이 여자와 관련한 문제가 가득한 임금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그가 다른 국왕과 달리 정치적 사건의 해법으로 자기 부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 숙종의 막강한 왕권은 왕위에 오를 때 어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완벽한 정통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통과 질서를 강조하는 조선왕조에서도 보기 드문 경우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통성 면에서 완벽한 그는 왕권을 눈치 보지 않은 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고, 이 시절에 신하들을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노는 환국(換局)이 그렇게 많이 일어난 것도 이런 완벽한 정통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로도 풀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화병이다. 숙종은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하였으니 성미는 매우 불같아서, 궁녀들이 머릴 빗겨주거나 옷을 갈아입히는 것조차 몸서리칠 정도로 극히 싫어했다. 그래서 머리를 빗겨주는 것은 어머니가 직접 했다고 하는데, 그나마도 못 참아 투정을 부리면 빗 등으로 머리를 때려가면서 빗겼다고 한다. 그래서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도 아들을 평하기를 ‘세자는 내 배로 낳았지만, 그 성질이 아침 다르고 점심 다르고 저녁 다르니, 나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숙종 14년(1688년) 7월 16일 숙종의 건강 상태를 이렇게 전한다.

‘이때 왕의 노여움(逆鱗)이 폭발하고 점차로 번뇌(煩惱)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욕설)이 끊이지 않았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한다, 마음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번뇌(煩惱)가 심했다.’ 전형적인 화병 증세다. 숙종 본인도 자신의 이러한 성품을 인지한 듯, 실제로 <숙종실록>을 보면 숙종 30년(1704년) 12월 11일 자에서 숙종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의 화증(火症)이 뿌리내린 지 이미 오래고 나이도 쇠해 날이 갈수록 깊은 고질(苦疾)이 되어 간다. 무릇 사람의 일시적 질환(疾患)은 고치기 쉽지만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것은 화증(火症)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일을 하면 화염(火炎)이 위로 올라 비록 한겨울이라도 손에서 부채를 놓을 수가 없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다른 이야기도 가능해진다. 바로 장희빈의 이야기다.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장희빈만 나쁜 여자고, 착한 숙종은 장희빈에게 홀려 조강지처를 저버리고 끌려다녔다는 이미지 말이다. 그것을 위의 화병과 다혈질로 사리 분별을 모르는 짓을 종종 했던 인간이라는 것은 여러 기록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서오릉에 숙종의 왕비 세 명 이야기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이들의 이야기는 영국 로열패밀리의 스캔들이 넘쳐나는 버킹엄의 스토리 못지않다. 더구나 서오릉을 둘러보려면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피크닉코스로도 안성맞춤이고 VR로도 체험할 수 있으니 명소 중 명소다.
정민준 기자 jil36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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