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희의 문화산책] 세종시 오디세이
정민준 기자 jil3679@daum.net
2023년 01월 09일(월) 09:07
▲유태희(시인, 소설가 · 극작가 · 사진작가 · 예술인협동조합 ‘이도의 날개’ 창작동동체 대표 · 세종행복도시필하모니오케스트라 대표)
인간이 호모 에렉투스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한 것은 오로지 두 다리 덕택이다. 직립보행이 지혜로 이어진 것이다. 고대로부터 걸음의 미학은 문학에서도 서술된다. 봉이 김선달도 걸었고 영국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는 평생 걸었다. 두 다리로 걷는 보행이 사유를 만나는 공간에는 철학이 피어난다. 이를 우리는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소요학파(逍遙學派), 즉 걸으면서 지혜를 나누는 철학자들이라 한다. 사유하기 위해 걸었다는 서양철학자들의 계보는 현대까지 이어진다. 루소, 칸트, 니체, 후설 등 위대한 사상가들의 사고에는 두 발이 중심이 된다.

거미줄처럼 호수공원을 중심으로 이어진 세종시의 산책길은 시인 이상이 노래한 한 시편처럼 푸르스름하다. ‘도시의 붕락(崩落)은 아- 풍설(風說) 보다 빠르다.

이렇게 걸음의 미학은 문학에서도 서술된다. 세종시 김백겸 시인도 영국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도 평생 걸었다. 그는 두 다리를 문학의 도구로 삼았다. 산과 숲 깊숙이 걸어 들어가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신성한 속성을 자연 생명체를 통해 발현하는 문학의 계보가 워즈워스로부터 시작된다. 시인 김백겸도 그렇게 노래한다.

세종 행복도시는 정부청사와 호수공원을 중심으로 1 생활권에서 6 생활권이 방사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산보자가 자전거도로를 모두 지나 세종 코끼리도시를 만져보는 때는 언제인가?
산보자가 고산자 김정호처럼 한반도 전체를 자동차로 일주해보는 때는 언제인가?
산보자가 비행기로나마 지구촌 전체를 방문해보는 날은 언제인가?
시간이란 커다란 공간의 한쪽 축이어서 죽는 날이 걸음을 멈춘 마지막 장소임을 산보자가 깨닫는 순간은 언제인가?
산보자가 평생을 걸어간 공간의 흔적-그 백일몽의 크기는 얼마인가?

산보자는 세종시 반곡동 햇무리교에서 한솔동 한두리대교까지 금강과 친구 하는 오후의 행복 한가운데를 걸어간다
산보자는 마음의 미로 속에 산책길을 만들고 미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행복 한가운데를 걸어간다 (중략)

태양은 오늘도 아폴론 마차처럼 다가와 빛의 풍경을 동쪽 항구에 부려 놓더니 도시의 하늘을 가로질러 금강이 흘러가는 서쪽으로 넘어간다
문명의 어매니티(amenity)를 지우는 황혼의 어둠이 오고 마음은 침묵의 지혜를 위해 몇 억 년 전의 별빛에게 은하성단들의 메시지를 묻는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명제는 침묵해야 한다’고 언명했으니 침묵에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진실이 있다는 의미

저녁이 오자 동쪽 하늘에 부상(扶桑)한 별들이 차가운 예언을 내뿜으며 금강의 물속에 빛나기 시작한다
서해로 흘러가는 금강- 사행천의 시간에 기대어 서니 산보자의 몸이 물 위에 뜬 단풍잎처럼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산보자가 세종시에 혼자 있는 보름달과 친해지기 위해 대전시 대흥동 수도산자락으로부터 걸어온 70년
산보자가 소나무 위로 뜬 보름달과 친해지기 위해 걸어온 금강변 산책길
산보자가 강 건너 숲의 어둠과 마주한 채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포에지의 황홀을 독자가 이해한다면 기쁘겠고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은 없고(중략)

법(法)이라는 개념의 큰 보자기, 큰 보자기가 세상을 덮고 있는 상상으로 괴로웠던 오후
운명이라는 독새, 독새의 날개가 어둠에서 날아오고 그 그림자의 독으로 산보자가 비명횡사할까 봐 두려웠던 오후
현자의 지팡이도 범부의 운동화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던 오후
마음속에 뜬 검은 태양이 메두사의 울부짖음 같은 코로나를 뿜으며 산보자를 쳐다보았던 오후
시멘트 길에 죽은 지렁이 시체가 검은 음표를 드러내면서 개미떼들이 저승사자처럼 몰려와 죽음과 삶의 결혼 행진곡을 연주하던 오후
적란운은 편서풍을 타고 흘러갔는데 신경망처럼 뻗은 세종시 황용리 길들이 비단뱀처럼 몸을 구부린 오후(중략)

<김백겸시인의 ‘산보자가 세종시 행복 한가운데를 걸어간다’에서)

김백겸 시인은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가 추구한 현대인의 유목을, 근대체계와 자아의 폐쇄성을 넘어서려는 사회의 어떤 집합적 경향성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자연의 회귀로 풀고 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다. 산보를 통해 나를 다지고 사람도 물 흐르듯 자연과 하나 된다. 애써 의미를 찾지 않아도 산보자는 순간순간이 의미가 된다. 미로 속에 길을 잃어버리는 것마저 행복이라 여기며 그 한가운데를 걸어간다.

기성 문학의 질서를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창작 활동을 인정받아 오스트리아는 물론 유럽 문학계에서 권위 있는 문학상을 휩쓸었던 노벨문학상 수상자 페터 한트케. 그는 무질서한 전개와 강박적인 말놀이로 그리는 현대인의 불안과 소외를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으로 풀어냈다. 그는 ‘산책의 종말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거리 모퉁이의 너
현대인의 고독에 관한 역사를
우리는 그래 그 사이에 알게 된다.
이제 너 역시 사라진다
바람 많은 거리 모퉁이의 밤.

도시의 산책자는 더 이상 심심하고 무료함을 없애거나 세월을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새로운 각성을 통해 창조로 나가기 위함이다. 김백겸시인의 산보도 고향 대전이 아닌 타향인 도시, 세종시의 낯섦과 유목적 행위를 황용리 비단 같은 산책로를 걸으며 찬미하는 이유 그러하다. ‘이게 마지막일지 모르는 애절함이다. 망쳐서는 안 되는 마지막 산보, 실패하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는 애절함일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도 황용리 비단길이 이응교로 이어져 산보자를 따뜻하게 감싸 품어 산보자에게 새로운 시어를 내어준다. 다시 정주(定住)에서 유목(遊牧)으로 나가기 위해 아폴론의 마차에 오르는 것처럼.

붓다는 태어나자마자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그는 그렇게 인도의 룸비니 동산에서 처음 입을 열었다. 붓다는 어머니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다. 태어나자마자 걸으며 희망의 어리석음을 만나고 탐욕과 기만의 끝을 보고 알아차린다. 인간이 존재한다고, 영원할 것이라고. 자아의 주관적 환상이 그림자였다는 것을 걸으며 체득한 것이다. 고로 걷는다는 것은 사람의 완성이다. 걸음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다. 빛 위에 그림자가 있든가.

예수께서 부자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이렇게 비유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때가 없으니 어쩌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생각했다. ’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하고.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걸음은 생각을 바꾸는 새로운 생각을 만나는 길이다. 1과 99는 동등하며, 지식을 자신만의 생각과 지혜로 바꾸는 본성적 행위이다. 아울러 걸음은 생각 think이 감사 thank가 되는 길이며, 걸음은 명사를 형용사로 바꾸는 길이다. 아차, 그곳에 空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사랑이다. 그것이 그것을 넘어가는 아제 아제 바라아제처럼 진리는 걸음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그도 걱정하지 마라,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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