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희의 문화산책] 융통무애의 정신을 상기하자
정민준 기자 jil3679@daum.net
2023년 03월 12일(일) 18:38
▲유태희(시인, 소설가 · 극작가 · 사진작가 · 예술인협동조합 ‘이도의 날개’ 창작공동체 대표 · 세종행복도시필하모니오케스트라 대표)
조선 시대 현종의 시대는 정쟁으로 시작해서 정쟁으로 끝났다. 즉위하던 해와 승하하던 해 예송 논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현종의 아버지(효종)와 어머니가 죽었을 때 할머니(장렬왕후)가 상복을 각각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벌어진 권력 투쟁이었다. 그 사이의 10여 년은 유례없는 고난의 시기였다. 가뭄과 병충해, 기상이변, 전염병이 끊이지 않아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 고난의 시작이 1661년 신축년이었다. 그 바람에 현종은 조선의 왕 중에서 유일하게 후궁이 없었다. 천재지변과 재난이 끊이지 않는데 왕만 혼자서 후궁을 맞이하는 기쁨을 신하들이 용납하지 않았다. 재난이 일상화됨에 따라 구호물자를 관리하는 진휼청(賑恤廳)이 상설기구가 될 정도였다. 이런 사정을 전해 들은 중국의 황제 강희제는 그런 조선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상복을 몇 년 입느냐와 같은 공리공론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여론이 분열되는 것은, 왕권이 허약한 탓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왕을 능멸하는 신하와 백성들이 하늘의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비웃었다 한다.

그 무렵 영국에서는 전염병 때문에 왕권이 오히려 하늘을 찔렀다. 청교도혁명의 주역 크롬웰이 전염병으로 죽고 공화파가 흩어졌다. 그 틈을 타서 외국에 있던 찰스 2세가 귀국했다. 왕정복고에 성공한 찰스 2세는 과거사 정리에 돌입했다. 10년 전 자신의 아버지를 처형하는 데 앞장섰던 신하들을 하나하나 참수했다. 크롬웰의 유해는 부관참시했다. 1661년 신축년이었다. 하지만 찰스 2세도 재난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공중위생이 지독하게 불량했던 런던에 1665년 흑사병이 창궐(런던 대역병)했다. 그래서 시민의 10%가 죽었는데, 이듬해인 1666년에는 런던 시내에 큰불(런던 대화재)이 나서 템스강변이 숯덩이가 되었다. 나라 안이 이토록 어수선했으니 네덜란드와의 식민지 전쟁에서도 계속 졌다. 유일한 승리는, 북미 신대륙의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뉴암스테르담 지역을 빼앗아 뉴욕과 월스트리트라는 새 이름을 붙인 것이다.

조선도 그 무렵 마침내 자연재해와 전염병에서 벗어났다. 긴 고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열심히 살았다. 1661년 신축년에 태어난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상공업이 눈에 띄게 발전했다. 곳곳에 시장이 형성되고 대외무역도 크게 늘었다. 상거래가 늘다 보니 상평통보도 다시 발행되었다. 상평통보는 인조 때 시도되었지만, 백성들이 화폐 사용에 익숙지 않아서 곧 사라졌다. 그러나 숙종 때 다시 발행된 뒤부터는 고종이 폐기할 때까지 법화의 자리를 단단히 지켰다.

돌이켜 살펴보면 예송 논쟁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첫 번째 논쟁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른 효종이 죽자 그 어머니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일어났다. 이것에 대해 서인은 효종이 조대비의 둘째 아들이므로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가 정리한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법(주자가례)’에는 장자가 죽었을 경우, 부모는 3년 동안 장례의 예를 갖춰야 하고, 차남 이하는 1년간 해야 한다고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인은 이에 대해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임금이 되었으므로 장남과 같이 대우하여 3년(만 2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은 1년으로 결정하였고, 논쟁에서 승리한 서인은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

두 번째 논쟁은 효종의 아들이었던 현종이 임금이 된 후에 효종의 왕비였던 인선 왕후가 죽자 시어머니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벌어졌다. 주자가례에는 첫째 며느리의 경우는 1년, 둘째 며느리에게는 9개월간 장례의 예를 치르도록 하고 있다. 서인은 인선 왕후가 조대비의 둘째 며느리이므로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9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남인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도 임금이 되었으므로 장자로 대우해야 하며, 인선 왕후에게도 장자의 며느리에게 해당하는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에서는 조대비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논쟁에서 승리한 남인과 이에 동조한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예송 논쟁은 겉으로는 장례의 예법에 대한 논란이었다. 그렇지만 이 논쟁은 임금이라고 하더라도 일반 사람과 똑같은 예법을 적용하느냐, 왕위의 계승 원칙은 어떻게 정해야 하느냐 등 현실 정치의 핵심적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고, 한편으론 학파에 따라 성리학의 해석을 달리하는 학문 논쟁의 성격도 띠었다. 이이의 학풍을 계승한 서인과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은 남인이 학파 간 대립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 세계는 지독한 인플레이션에 빠져 민생이 허우적거리고 있다. '개들이 짖어도 캐러밴은 전진한다(The dogs bark, but the caravan moves on)'는 아랍 속담처럼 먼 길을 가는 캐러밴은 주변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적지만 바라봐야 한다. 예송논쟁을 벌이지 않았으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한 정치가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서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은 캐러밴이 아니다. 여론을 경청해야 한다.

하지만 대공황 때 영국 중앙은행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래서 비싼 대가를 치렀다. 1930년 12월에는 유나이티드스테이츠라는 미국 최대 은행도 파산했다. 그 여파로 이듬해 5월에는 오스트리아 최대 은행이 문을 닫았다. 그러자 7월부터 독일에서 예금인출 사태와 은행 강제 휴무가 시작되었다.

한국도 금융위원회를 열어 3월 10일 기업 M&A(인수·합병)지원 간담회 열어 공개매수·합병 시 불합리한 규제 등을 정비할 예정이고, 은행권도 과점 체계 허물기에 나선 가운데 보험, 증권, 카드사에 지급결제 서비스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것은 비은행권 회사들에 입출금 계좌 제공 등 은행 핵심 업무 영역을 허용함으로써 유효 경쟁을 촉진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은행권 경쟁 촉진을 위한 금융권 업무 영역 조정 논의가 자칫 '밥그릇 싸움'으로 번져 소비자 효용이 뒷전으로 밀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힘없는 국민은 그저 가만히 융통 무해의 정신을 상기해주었으면 하고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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