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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 다음 이어지는 질문이 오고가는 길이 어떠냐는 것이다. 그리고 시댁에서의 일이다.
시댁이 수원이라 길이 막히는 경험은 그다지 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옆 차선은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국도를 이용해 주로 가기 때문에 명절 당일에 공원묘원을 가는 인파와 맞닥뜨려 밀린 적이 한 번 있다.
또 설에는 폭설 때문에 3시간 넘게 밀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난 항상 도로를 전세내고 다닌다고 말한다.
이번에도 달라진 것 없이 제 속도와 제 시간을 딱 맞추었다. 그리고 옆 차선의 전등불빛은 도로의 모양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슈퍼우먼이 아니다보니 일과 살림을 결코 잘 병행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끔 ‘떡시루의 절반은 엎었다’고 말하면 모두 웃고 만다. 그러면서 속으로 참 한심하다 하는 생각을 한다.
내 자신 스스로가 내게 붙인 별명은 ‘김 설거지’이다.
그나마 난 셋째 며느리이기 때문이다. 결혼 18년차가 되도 음식을 만들 줄도 맛도 못 낸다.
어느 것 하나 음식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 없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초등학교까지는 명절에 모이면 숟가락을 24개를 놓았다.
음식을 만들때부터 온 식구가 북적이는 것이다. 아버님 고향이 이북이라 친척이 없지만 6남매이기 때문이다.
밥 먹고 나면 금방 점심, 저녁이었다. 서투른 나는 집에 돌아오면 입술이 부르트고 몸살을 앓기도 했다.
참 고된 일의 연속이었다. 1년 두 번이니 참자였다. 그리고 며느리들은 남편들이 한없이 야속해서 살금살금 남편들을 시켜먹었다(?).
물론 처음에는 어머니의 얼굴 표정이 바뀌었지만 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다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 사이 변한 것은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시댁의 조카 아이 하나는 미용일 배우러 카나다 가고, 조카아이 하나는 비명에 하늘나라에 갔다.
며느리 하나는 완전한 독립을 해 제 갈 길로 가버렸다.
요즘은 음식을 만들 때는 큰 아이들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다.
그러다가 명절 아침이 되니 우르르 다 모였다. 아침 먹고 나자 아이들은 하나 둘 흩어졌다.
점심 지나니 결혼을 한 조카가 딸을 데리고 나타났다.
저녁을 차리는데 17개의 숟가락을 놓으면서 ‘그사이 세월이 많이 변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다 지나가리라’ 그랬었다. 그 당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을 즐기자 하면서도 또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을 탓했다.
명절의 그 짜증스러움과 힘들어서 몸살이 앓았던 기억이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그렇다고 평안한 상태의 명절은 아니다. 다른 일들로 머리 속을 괴롭히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것도 즐기자, 그러면 또 세월은 흐르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