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희의 문화산책] 고마워요 헐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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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희의 문화산책] 고마워요 헐벗
  • 입력 : 2022. 12.13(화) 14:11
  • 정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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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희(시인, 소설가 · 극작가 · 사진작가 · 예술인협동조합 ‘이도의 날개’ 창작동동체 대표 · 세종행복도시필하모니오케스트라 대표)
한국인이라면 잊어선 안 될 이름이 있다. “호머 헐버트”다. 정식 이름은 호머 베 절릴 헐버트(Homer B. Hulbert)이다. 우리에겐 국보 경천사 십층 석탑을 지켜낸 한글 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이런 영화 같은 일이 있었다. 1907년 일본 궁내부대신인 다나카는 황태자 순종 결혼식에 축하사절로 참석했다가 개성에 있는 경천사 십층 석탑을 일본군 85명을 보내 뜯어서 일본으로 가져 가버린 일이 벌어졌다. 이를 안 한국의 문명화와 국권 수호를 위해 온몸을 불사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는 즉시 현장을 답사한 뒤 《재팬 크로니클》과 《뉴욕포스트》에 기고하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헤이그에서도 이 사실을 폭로했다. 이런 헐버트의 노력으로 국보 86호 경천사 석탑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헐버트는 ‘사민필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를 펴내면서 한글 애용을 주장한 한글 학자이기도 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고 평소 소원한 대로 그는 서울 양화진에 묻혔다.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는 해마다 8월 5일 양화진 묘지에서 헐버트 박사 추모식을 열고 있는데 2022년 8월 5일은 73주기를 맞이하는 해였다.

헐버트는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온 이래 《독립신문》 창간에 이바지했고 1907년 고종 황제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을 건의하기도 했다. 이 일로 1910년 이 땅에서 추방되었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3·1 운동을 지지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할아버지의 60주기 추모식에 참석하였던 헐버트 박사의 손자인 브루스 헐버트는 "열 살 때까지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 할아버지는 한국의 아리랑과 전래동화를 손자 손녀들에게 매일 들려주셨는데, 일본 이야기가 나오면 매우 격해지셨다"라고 전했다. 이국땅에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다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잠든 푸른 눈의 한국인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한국사랑에 대한 작은 보답이다.

호머 헐버트는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요, 사학자였다. 그는 7개 국어를 구사하는 언어학자, 조선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교육자, 독립신문 발행을 도운 언론인, YMCA 초대회장, 한국어 연구와 보급에 앞장선 한글학자였다. 또한 고종을 도와 대한제국 말기 국권수호를 적극 도왔으며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이 추서 됐다. 2014년 한글날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 되었던 외국인이다. 그는 한국어에 능통하였고,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에 매료돼 미국 언론과 영문 잡지에 기고와 논문을 통해 한글과 한국문화를 홍보했고, 한글에 띄어쓰기 도입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띄어쓰기가 본격적으로 한글에 도입되도록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울러서 고종 황제의 최측근이 되어 보필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 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도 했다.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어 고종황제로부터 세 번이나 특사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대한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을 돕고 그 또한 특사가 되어 직접 헤이그로 가서 활동하였다. 1919년에 있었던 3.1 운동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놀라운 것은 그는 안중근 의사가 존경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안중근은 일본 경찰에게 조사를 받던 1909년 12월 2일에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겼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대한제국 시대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더불어 헐버트를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1949년에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광복절 기념식에 참가하고자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40년 만에 다시 내한하였으나 누적된 여독으로 인해 입국한 지 7일 만인 8월 5일에 별세하였다. "내가 젊은 날 사랑했던 한국땅에 묻히고 싶다"는 평소 고인의 유지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생을 마감하기 전 헐버트 박사의 두 가지 소원이 한국의 통일과 일본이 빼앗아 간 고종황제의 내탕금(內帑金)을 찾는 것이었다" 했다. 헐버트 박사는 1903년 독일계 은행인 덕화 은행에 예치해 둔 51만 마르크 상당의 금괴와 일본 엔화를 찾아달라는 고종황제의 부탁을 받고 이를 위해 40년 동안 노력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 김 회장은 "덕화 은행장이 고종에게 써준 예치금 영수증, 통감부 외무총장이 독일 측에서 돈을 받고 써준 영수증 등 증거자료도 있다"며 "오늘날 화폐가치로 정확히 산출할 수는 없지만, 연리 10%로 100년을 계산하면 약 2조 원에 달한다"라고 주장했다.

비방이 극에 달하고 정의가 빛을 잃은 이때
나의 큰 존경의 표시와 변함없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 황제 폐하에게

그리고
지금은 옛 한국이 낯선 한국에게 자리를 내주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으나 민족정신이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은 죽음의 모습을 하지만'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 국민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호머 헐버트,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의 헌사, 1906년
Dedicated/To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As a token of high esteem and a pledge of unwavering allegiance,/at a time when calumny has done its worst and justice has suffered an eclipse/and/To the Korean People/who are now witnessing the passing of old Korea to give place to a new,/when the spirit of the nation, quickened by the touch of fire,/shall have proved that though "sleep is the image of death" it is not death itself




정민준 기자 jil36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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