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희의 문화산책] 푸드가즘(foodgasm)의 상업화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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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희의 문화산책] 푸드가즘(foodgasm)의 상업화에 대한 소고
  • 입력 : 2023. 04.28(금) 08:21
  • 정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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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희(시인, 소설가 · 극작가 · 사진작가 · 예술인협동조합 ‘이도의 날개’ 창작공동체 대표 · 세종행복도시필하모니오케스트라 대표)
푸드가즘은 ‘음식을 섭취하면서 느끼는 쾌감’을 뜻하는 단어다. 동물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욕망은 식욕과 성욕이다. 인류학자 존 앨런이 쓴 <미각의 지배>라는 책에는 매리 피셔라는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피셔라는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데이트한 경험을 토대로 미식가 남성 독신자들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들의 요리에 대한 접근은 대부분 성행위에 근거를 둔다. 79세 이하 남자치고 예쁘지도 않은 여자에게 훌륭한 음식을 대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여성에게 내놓은 요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분위기를 잘 조성해서 그 여성과 하룻밤을 보낼지에 더 관심이 많다.’ 이렇게 남녀의 사랑에 음식은 좋은 매개가 된다. 그리고 실제로 음식과 성(性), 식욕과 성욕은 밀접한 관계다. 식욕과 성욕은 수면욕과 함께 인간의 3대 기본 욕구이다. 이 둘은 인간의 뇌에서 호르몬 분비를 조절하는 시상하부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식욕 중추와 성욕 중추의 간격은 불과 1.5㎜ 정도로 매우 가까워 하나의 중추에 영향이 미치면 다른 중추도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남녀의 차이가 존재한다. 식욕 중추는 배고픔을 느끼는 섭식 중추와 포만감을 느끼는 포만 중추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남성은 섭식 중추가, 여성은 포만 중추가 성욕 중추와 근접해 있어, 상대적으로 남성은 배가 고플 때, 여성은 배가 부를 때 성욕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마음에 드는 여성을 침대로 유혹하려면 일단 밥부터 먹이라’는 이야기들도 있다.

오래전부터 이러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식품회사나 패션, 자동차회사들이 브랜드 광고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또 한 음식과 성의 에로틱한 관계는 언어를 통해 확장되고 강화된다. 성행위를 암시하는 단어에는 유난히 요리와 음식에 관련된 단어들이 많다. 대표적인 표현이 “먹는다”이다. 음식을 먹는 행위와 성행위를 뜻하는 중의적인 표현으로 자주 소설에서도 자주 쓰인다. 존 앨런은 “음식을 먹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성행위는 보통 입술과 혀에서 시작해 하반신이 개입해 끝난다. 어쩌면 이러한 해부학적 일치 때문에 사람들이 두 행위를 같은 단어로 표현하는지도 모른다.모른다” 했다. 이렇게 식욕과 성욕의 밀접한 관계는 인간의 신체를 음식에 비유하거나, 성행위를 먹는 것에 빗대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를테면 남녀의 성기는 바나나, 버섯, 조개 등 다양한 식품으로 표현되고, 여성의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는 자주 탐스러운 복숭아에 비견된다. 앵두 같은 입술, 고사리 같은 손 등이 그것이다.

이 같은 식욕과 성욕, 음식과 성의 에로틱한 관계는 오랜 세월 동서양의 시와 소설, 영화나 그림 등 예술작품에서 표현돼 왔다. 사랑을 하는 이유는 뭔데? 섹스 아니야? 문단의 이단아. 음란물 제조자. 한국 에로티시즘의 거두라 불리는 마광수는 이렇게 말했다. 더구나 그는 ‘철학책을 출간하는 행위나 에로티시즘 소설을 출간하는 행위나 무언가를 상품화하여 먹고 살아간다는 점에 있어 몸·정신의 상품화는 모두 마찬가지의 행위다. 상품화를 피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며 “인신매매·사이비종교 등 나쁜 상품화의 구별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을 소재로 책을 써서 파는 행위나 자발적 매소(賣笑)·매춘을 두고서 ‘성의 상품화’라 꼬리표를 다는 것은 분명 앞뒤가 안 맞는 가치판단”이라 말한 바 있다.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의 ‘샤만카’ 역시 여주인공이 섹스 파트너를 음식 재료로 만들어 먹음으로써 비로소 육신의 일체감과 정신적 승화로 섹스를 완성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또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비 가스 루나 감독의 <하몽하몽>, 박철수 감독의 <301·302> 등 적지 않은 영화가 음식과 섹스의 상관관계를 적나라하고 은밀하게 묘사하지 않았던가. 그것을 법에 근거하거나 사회적 규범에 반한다고 하여 내치지 않았다면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는 우리 곁에 아직도 머물지 모른다.

오늘날 예술·문화를 파괴하려는 경향. 또는 그 행위를 칭하는 반달리즘과 퇴행적 정파들의 교조화는 특히 이 같은 행위에서 언어가 갖는 힘에 주목해 기존의 가치를 아예 언급하지 못하도록 금기(Taboo)와 시키거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처럼 신어(新語, Newspeak)를 사용하도록 해 곡해와 왜곡도 모자라, 극단주의의 교조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인지 부조화를 오웰은 소설에서 ‘이중사고’라 하였다. 알다시피 이러한 억압에는 극단주의가 가진 정치적 권위·권력을 훼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생존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극단주의가 주장하는 가치·교리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갖는 힘에 대한 도전이자 그 힘으로 생존하는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위협이 될 것이다. 극단적 페미니즘처럼 비판을 거부하는 극단주의는 중국식 마오이즘의 홍위병이거나, 이슬람 극단주의처럼 국가와 시민사회 그리고 개인의 사고를 가로막는 정치권력이자 자유의 탄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의 신체, 성이 갖는 아름다움이나 관능미 등 절대적 가치를 부정하고 이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할 때 인간은 진화하지 않고 퇴행하는 역사가 있어 왔다. 또 이를 강요하는 자들은 이성적·합리적 사고로 극단주의적 교리를 받아들임이 아닌 증오·혐오에 동조하거나 이 같은 극단주의자를 양성해 정치적 권력을 침탈하려는 자들 둘 뿐이다.





정민준 기자 jil36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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