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희의 문화산책] 핵 개발은 대한민국의 생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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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희의 문화산책] 핵 개발은 대한민국의 생존이다
  • 입력 : 2023. 05.06(토) 10:32
  • 정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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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희(시인, 소설가 · 극작가 · 사진작가 · 예술인협동조합 ‘이도의 날개’ 창작공동체 대표 · 세종행복도시필하모니오케스트라 대표)
이번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성과에 하나는 핵무장 잠수함을 배치할 것이라는 워싱턴선언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냉전 기간 그랬던 것처럼 남쪽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것을 포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미국 관리들은 말했다. 북한은 현재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며 협박하고, 핵잠수함 하나로 입막음을 하려는 미국도 모두 마땅치 않은 이것이 지금 한반도의 슬픈 현실이다. 미국이 한국의 핵 개발을 막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핵 개발을 하게 되면, 주변국인 일본도 핵무장을 시도할 것이고 이어서 중동 국가도 핵무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핵보유국 5개국(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을 제외하고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의 국가들은 어떻게 핵무장을 하게 되었는가 살펴보면 거기에 해답이 있다.

냉전 시절이던 1974년 5월18일, 인도의 북서부 라자스탄 사막에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비동맹을 이끌던 인도의 첫 번째 핵실험 순간이다. 경제적 곤궁에 처한 인도 국민은 13㏏의 파괴력에 모두 환호했다. 10여 년 전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굴욕감도 죽음의 구름에 날려버렸다. 이때 미국은 차관 중단 등 경제적 보복을 다짐했지만, 소련은 평화적 이용 목적이라며 감쌌다. 소련의 지지는 중국 견제를 위해 인도와 동맹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이때 인도의 비밀 핵실험 프로젝트를 ‘미소 짓는 붓다(Smiling Buddha)’로 부른다. 아마도 첫 실험일이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인도 경축일인 데서 유래했을 것이다. 국제질서의 냉혹한 현실을 깨달았다는 의미지만 살생을 금하는 불교 종주국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기도 하다. 원래 인도는 핵무기 개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1947년 독립 이후 비동맹을 추구하던 인도는 간디가 주창한 비폭력의 유산이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정 상황도 여의치 못했다. 그런데도 1962년 중국과 벌인 국지전에서 패배하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북한은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시작으로 2009년 5월 2차, 2013년 2월 3차, 2016년 1월과 9월에 4·5차, 2017년 9월까지 총 6차례의 핵실험을 단행했다. 북한은 이 6차례의 핵실험을 통해 핵 능력을 점차 끌어올렸으며, 현재 상당한 수준의 핵 소형화를 달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북한의 계속되는 핵실험 이후 핵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럼으로써 국내에서도 핵무장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야당은 물론 여당 일각에서도 전술핵 재배치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실정이다. 북한이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으니 공포의 균형을 이루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논리가 당연히 우세하고 있다.

우리도 박정희 정부 시기에 핵무장 계획을 진행했으나 관련 정보를 얻은 미국의 개입으로 결국 중단되었다. 그 이후 박정희 정권 치하의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었고, 한국 정부는 곧바로 정상회담을 요청해 동년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정희와 닉슨이 회담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닉슨은 주한미군의 변화에 대해 사전 통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1970년 3월,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박정희에게 주한미군 2만 명을 이듬해까지 철수하고 1975년에 완전히 철수할완전철수할 것을 통보했다. 베트남전의 대규모 국군 파병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한국에서 미군 철수가 가시화되는 단계에 이르자 박정희 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 1970년, 무기 개발위원회(WEC)와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설립되었고, 무기 개발위원회에서 핵무기 개발이 위원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한편 ADD에서는 무기 국산화 사업인 ‘번개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70년대까지 이스라엘 수준의 자주국방을 목표로 기본 병기 국산화를 완료하고 80년대 초까지 항공기, 유도탄을 국산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 오원철 전 수석이 수시로 방문해 관리했다고 한다. 살펴보니 11대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은 박정희가 "미군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원자폭탄을 연구해 보자. 핵무기를 개발하다 미국이 방해해 못 만들게 되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라도 갖춰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군사전문가들은 북한의 핵 개발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인 지점(Point of No Return)'을 이미 지났다고 보는 시각들이 강하다. 이런 인식은 이미 참여정부에서 대북화해협력정책과 6자회담을 통한 북핵 위기 해결을 강력하게 지지하던 박선원 전 청와대 행정관 같은 유화론자조차 공개적으로 발언했었다. 2017년 8월 박선원 전 행정관은 한시적 미군 전술핵 반입, 대북 심리전 재개를 통해 한국의 전략적 열세를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진보 진영이 이런 의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도 공개 표명했다. 그러나 이제 북한의 핵 개발은 동아시아의 안보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다. 한발 늦은 것이다.

이로써 핵무장을 지지하는 국민 여론은 꾸준히 60~70%로 반대 여론의 두 배가량을 유지하며, 매우 높은 편이다. 하지만 한국은 고도의 핵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여러 여건 때문에 핵무장을 할 수 없는 국가이다. 경제 제재와 외교적 압박을 감수할 만한 국력이 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원자력 발전용 핵연료를 포함한 에너지자원과 식량을 해외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경제구조가 매우 치명적이다. 당장 전력 생산의 1/3을 차지하는 원자력 발전용 핵연료는 사실상 전량, 그리고 석유와 석탄, 천연가스도 대부분 수입이고, 식량자급률은 50%에도 미치지 못한다. 거기에 군사력 또한 전술, 정보자산을 대부분 미국에 의존하는 게 현실이다.

또 한 북한이 꿈꾸는 드림플 랜의 실현이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한국은 장차 국가 존립을 위해 어떤 출혈을 감내하고서라도 핵무장을 해야만 하는 날은 오고야 말 것이다. 그때까지는 차선으로서 재래식 전력의 우위와 굳건한 한미동맹이라는 기존의 귀중한 자산으로 북핵을 통제하는 수밖에 없으며, 핵 자체는 만들지 않더라도 핵 관련 기술 및 미사일 기술 개량을 통해 여차하면 최단기간에 핵무장이 가능하도록 핵 역량도 끌어올릴 필요 있음도 물론이다. 하지만 핵무장의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스라엘과 남아공의 모델처럼 우리 한국과 일본, 대만이 함께 공동 핵 개발을 구상해 보자. 1956년에는 프랑스와 서독이 핵무기의 공동개발 및 완성된 핵무기를 일부 공유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핵 개발 계획에 합의하고 실행 직전까지 갔던 사례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의 통 큰 제안으로 일본과의 관계가 진정성 있게 변한다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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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준 기자 jil36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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