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동양의 카네기, 거부가 되다

문영숙의 꼭 알아야 할 항일독립운동가 최재형
[12회]동양의 카네기, 거부가 되다
- 문영숙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 입력 : 2022. 01.13(목) 11:14
  • 가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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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숙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문영숙의 꼭 알아야 할 항일독립운동가 최재형/CTN] 1899년 11월 2일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청나라에서는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일어났다. 의화단 사건은 서양 열강들이 앞을 다투어 청국의 이권을 뜯어가자 청국의 개혁파들이 '외국인에게 죽음을(滅洋)'이란 기치를 내걸고 외세배척을 앞세워 폭동을 일으켰다.

의화단 사건은 외국인 선교사를 죽이고 공장과 교회 등을 파괴한 사건으로 폭동은 청나라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의화단의 봉기가 만주까지 번지면서 동청철도가 파괴되고, 철도수비 병력인 러시아 병사들과 충돌하자, 러시아는 7월에 만주에 파병을 하고, 10월에 전 만주 지역에 군사들을 보내 점령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가 이동하려면 군수품을 나르는 교통수단이 필요했다. 부지런한 한인들은 군인들이 필요한 운수업을 시작했다. 의화단 사건 덕에 운수업은 최고의 돈벌이가 되었다. 한인들은 재산이 쑥 쑥 늘어났다. 한인 중에서도 한익성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최봉준은 큰 재산을 모았다.

의화단 사건에 뒤를 이어,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한인들이 할 일은 더 많아졌다. 특히 최재형은 군대에 물품을 납품해서 굉장한 부를 이루었다.

최재형은 니꼴라이 2세의 대관식에 재러 한인대표로 다녀온 후, 탄탄한 인맥을 통하여 얀치혜 군대의 어용상인으로 군부대에 소고기를 납품했다. 무려 한달에 소 150두를 납품했고 그 사업은 최재형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다.

최재형은 돈을 벌어 한인들의 편의와 포시에트 지역의 상업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최재형이 당시에 큰돈을 벌어서 유치한 회사는 추린, 쿤스트 앤드 알베르스, 피얀코프, 마르코프등 규모가 큰 회사로, 그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있고,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쿤스트 앤드 알베르스 회사 건물은, 지금도 화려하고 장엄한 유럽식 건물로 그 위용을 간직한 채 보존되어 있다.

최재형이 큰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그 중에서 한 바실리 루키츠, 한 엘리세이 구키츠 형제와, 김 표트르 니꼴라예비치, 최 니꼴라이 루키츠 등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그러나 최재형과 함께 함경북도에서 러시아로 이주해 온 최봉준은 최재형보다 두 살이 많았는데, 직접 배를 가지고 일본과 무역을 한 사람으로 조선 최고의 무역 왕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어마어마한 부를 이룬 최봉준은 나중에 최재형과 등을 돌리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어 서로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최봉준은 어떤 인물인가.

수원대 사학과 박환 교수는 최봉준의 삶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최봉준은 러시아에서 최초로 한글신문인 '해조신문'을 1908년 2월 펴낸 해조신문 창간호에서 "우리의 문명제도를 본받아 가던 일본에 보호라고 하는 더러운 칭호를 받으니"라고 분개하며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또한 성진 신평의 학교 교장은 물론 연해주 명동학교, 크라스키노(연추) 성흥의숙 설립 등 최재형처럼 교육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계몽운동가답게 안창호와 가깝게 교류하며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밖에 최봉준은 한때 '대동공보'(大東共報)의 운영자금을 맡았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역 의거 후에는, 그의 변호비와 유족의 생계비를 위하여 많은 금액을 전달했다.

1910년 8월 국권이 상실될 위기에 처하자 이상설, 유인석, 김학만 등이 시베리아 신한촌에서 한인들을 규합하여 조직한 성명회의 선언서 작업을 함께했다.

그러나 최봉준은 최재형과 달리 의병들의 항일무장투쟁에는 반대입장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크라스키노 지역 자산가이자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과 함께 활동해 왔지만, 1909년 최재형이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며 무장투쟁을 하기위해 최봉준에게 원조 요구를 하자, 최봉준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한 이유로 최재형과 최봉준이 갈라선 것으로 확인됐다. 학계 일각에서도 최봉준의 친일 행적을 증거로 삼는 사례가 되기도 했지만, 친일이라기 보다는 보수적인 계몽주의자 최봉준의 한계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최봉준에게는 공훈을 늦게 해서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위에서 밝힌 박환 교수의 글에서 보는 것처럼 최봉준은 항일무장투쟁이 자신의 사업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최봉준은 의병들이 일본을 상대로 항일투쟁을 하게 되면 무역을 하는 자신의 배들이 일본에 맘대로 왕래할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일본 편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봉준과는 달리 최재형은 자신의 이익보다는 항일투쟁이 먼저였다. 자신의 재산을 다 바쳐서라도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일본의 야욕에 맞서 항일투쟁을 할 수 있도록 앞장섰다. 최재형은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하는 대한의군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대한의군의 의식주를 지원했던 것이다.

참고서적 : 박환 교수의 <시베리아 한인 독립운동의 지도자 최재형>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가금현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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