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아록의 주인공, 이문건은 일찍이 중형(仲兄) 이충건(李忠楗)과 더불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13년(중종 8) 중형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화를 입자, 문인들이 화를 염려해 조상(弔喪)하는 자가 없었으나 이문건의 형제는 상례(喪禮)를 다하였다. 이에 남곤(南袞)·심정(沈貞)의 미움을 받아, 1521년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충건은 청파역(靑坡驛)에서 사사되고, 이문건은 낙안(樂安)에 유배되었다. 그 후 1527년(중종 23) 사면되어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 주서에 발탁되었다. 이어서 승문원 박사를 거쳐 정언·이조 좌랑에 이르렀다.
그런데 예전의 혐의로 대간으로부터 임금이 새 관원을 임명한 뒤에 그 성명, 문벌, 이력 따위를 써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臺諫)에게 그 가부(可否)를 묻던 서경(署經)이 거부되었으나, 김안로(金安老)의 협조로 관로(官路)는 순탄한 인물이다. 1539년 장군을 역임하며 관기 확립에 힘썼고, 그 뒤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를 거쳐 승문원 판교가 되어, 중종의 국상을 맞아 빈전도감(殯殿都監) 장관으로서 대사를 처리하였다. 1546년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尹元衡) 등에 의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같은 성을 가진 겨레붙이 족친(族親) 이휘(李輝)가 화를 입었고, 이에 연루되어 성주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성품이 부지런하고 온후했고 효성도 지극하였다. 이문건은 23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경사(經史)에 탐닉하고 시문에 힘쓰니, 뒤에 이황(李滉)·조식(曺植)·성수침(成守琛)·이이(李珥) 등이 이문건의 시문을 즐겨 읊었다 한다. 그 뒤 충북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 되었다.
이 문건은 자식을 여섯 명이나 낳았지만 대부분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겨우 살아남은 아들 ‘온’은 열병을 앓은 후 끊임없이 병에 시달려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그때 얻은 손자 ‘수봉이’가 양아록의 주인공이다. 자라면서 좋은 일이 많이 생기라고 ‘숙길(淑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숙길인가 폭음하자 초 명인 숙길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준 쑥으로 고치고 다음 해에 다시 수봉(守奉), 즉 받들어 지킨다는 의미로 개명하였다. 그렇게 살뜰하게 키운 손자 이수봉은 성인이 되어 임진왜란 때 우정침(禹廷琛), 윤우(尹佑)와 함께 의병으로 크게 활약했으니 조부의 기대에도 부응했다. 하지만 이 문건의 마지막 일기에는 손자가 커가면서 애정을 주면서도 지나치게 엄격하게 교육을 해 손자인 수봉은 이런 할아버지의 훈육을 따라가지 못하고 견딜 수가 없어 공부를 점차 멀리하고 술을 가까이하며 비뚤어졌다며 한탄하면서 노옹조노탄(老翁躁怒嘆)이란 시를 짓고 '늙은이의 포악함은 실로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는 자신의 훈육에 대한 반성과 함께 '할아비와 손자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고 썼다.
![]() |
정민준 기자 jil3679@hanmail.net
정민준 기자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