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뿌연 하늘에 보름달이 졸리운 듯 나지막한 빛을 발산하고, 보일락말락한 가로등불사이로 옅은 안개가 기어간다.
나지막히 흐르는 냇가를 따라 서서히 산책길에 오른다.

물오른 잔디가 어김없이 커가고, 접시꽃들은 무어라 중얼거리는지 저녁을 상념하고 있다.
목이 따가워 미리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제법 당도 높은 포도를 꺼내 한입 넣어본다.

조용하다 못해 누가 들을 새라, 살포시 흐르는 냇물은 달빛에 반사되어 내 시야를 어지럽힌다.

예전에는 황톳길이었던 곳이, 이젠 우레탄이라는 신물질로 바뀌어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살아있는지, 숨을 쉬는지조차 모르는 길을 수없이 왔다갔다 반복하고 무슨무슨 머시인인지 하는 운동기구가 냇가 둔치를 장식하고 있다.

어디에 어떻게 좋은지 모르겠으나, 그냥 있으니까 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성치 않은 어른신네도 즐길 수 있다는 게이트볼인지, 그라운드골프인지 하는 곳이 공일에는 어김없이 많이들 찿아 오고, 한켠에 자리 잡고 있는, 오래된 간이 화장실에는 하루살이들이 윙윙거리고 있고, 큼지막한 화물차들이 밤이면 이곳에서 긴 잠을 잔다.

큰 마트인가 아울렛인가 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는 저만치에선, 밤을 잊은 듯 연신 불빛을 내뿜고 있고, 오고가는 많은 차들 중에는 무엇이 그리 신나는 지 쿵쾅거리며 지나간다.

그 사이로 중년인 듯한 부부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가는 모습 옆으로 라일락 향인지, 아카시아 향인지 정겨운 냄새를 풍기면서 지나간다.

그래도 한결 다른 모습과는 비교가 되기에, 어찌그리 멋있고 아름다운지 한 번 더 지나갔으면 하고 기대해 본다.
얼마 전만 해도 이곳에서 셋방살이 할 때는 집 안 마당까지 황발이며 능젱이가 기어다니는 곳이기도 했다.

어느 곳은 방 한가운데 기둥이 있었으며,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계단 밑에 단지 하나 묻어놓은 화장실에 갈때면,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민망하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고, 기간이 만료됐다며 빨리 나가라고, 아직 방을 구하지 못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애원하던 곳, 지금은 선술집으로 바뀌어 막걸리 주전자가 뿌연 백열전구 사이로 얼기설기 걸려 있고, 거미줄로 덮혀 곳간처럼 전락한 곳, 말집 중에 제일 끄트머리 방에 얹혀살아 제법 눈칫밥을 먹던 곳, 한집에 여러 세대가 살아 요즘말로 번호표 뽑아야 화장실에 갈 수 있던 곳, 유난히도 많이 아팠던 곳, 알고 보니 전에 살던 사람이 삶을 비관하여 자살했던 곳, 연립 제일 꼭대기에 살 때는 땡볕에 달구어진 열로, 밤인지 낮인지 구별 못할 정도로 무더웠던 곳, 바로 큰 길옆이라 밤에 근무하고 낮에 눈을 붙이려면, 무얼 그리 사라고 연신 소음을 뿌리고 지나가던 곳, 이런 저런 생활을 접했던 시절들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어찌 생각하면 좋은 추억도, 알뜰살뜰 살던 기억도, 무거웠던 기억을 견디어 온 것도, 부대끼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도, 그저 비오면 맞아야지 하면서 체념하고 살아왔던 것도, 때론 누군가에게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을 열심히도 설명했었지.

아무리 볼품없는 개떡일지라도,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빚으면 맛도 있고 멋도 있으며, 모두 활짝 핀 예쁜꽃처럼 보이고, 시원스레 열린 창문처럼, 구름에서 벗어난 햇살처럼, 달콤한 꿈처럼, 모두 한결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텐데...

파란 한 방울의 잉크처럼, 산뜻한 청량감이 뇌리에 사무칠 때, 투명하게 마음속으로 적당한 온도로 다가오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으리라고.
잠시라도 무겁고 피곤한 몸뚱이를 살랑이는 바람에 맡기고, 다가오는 약속을 믿으며, 푸르른 잎새에 이팝나무 흔들리는 곳 찾아, 또 다른 시작을 맞이하자고 다짐해본다..

이윽고, 숨이 막히도록 향기 나는 길 따라 언덕배기에 오르니, 조그만 에너지가 온 몸을 지탱한다.
서두르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단념하지 말고, 한 길 만을 찾아 비록 작지만, 올곳은 마음과 바른 행동으로, 이치를 깨닫고, 순리에 순응하고, 능동적이고, 자연인으로 승화시켜,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는 기회의 땅이라 여기고, 희망을 찾아 떠나야겠다고 다잡아본다..

가만히 앉아 가슴을 쓸어안고, 저만치 보이는 사물을 바라보건대, 하찮은 미물이라도 업신여기지 말고, 한 가지라도 배울 점을 찾고, 만들고, 탄생시켜 내 것으로 만들고, 내가 살아가야 하는 방법으로 재조절하여, 모든 이에게 이상을 전해주고 싶고, 처한 현실에 한낱 꿈이 아닌, 최선의 선택으로 진정한 삶을 영위해야 하겠다.

이제 밤이 깊었다. 부드러운 또 다른 내일이 다가온다.
눈부시지 않더라도, 정겨운 만남을 기다리자고 악속하며, 즐거운 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오늘 밤은, 제법 곤히 수면을 취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선한 공기를 너무 마셨는지 제법 한기가 온몸에 느껴진다.
내일을 위해 신선한 엔돌핀을 만들어 보아야겠다.

불현듯, 누군가의 이 말이 생각났다.
“욕심내지 말고, 행복한 순간이 50%가 넘는 삶을, 매일 살면 좋겠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