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TN논단]정암 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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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N논단]정암 조광조
- 가갑손(충청대학교 명예교수)
  • 입력 : 2020. 08.24(월) 16:45
  • 가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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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N논단] 정암 조광조(1482. 성종13~1519. 중종14)는 500년 전 중종반정을 이끌었고 중종이 아낀 사림파의 거두, 호조·예조·공조좌랑·대사헌에 제수되고 도학 정치를 실현하고자 개혁을 추진했으나 당시 남곤·심정 등의 훈구파와의 갈등과 음모로 38세로 사사 되었다.

급진적 개혁, 이상과 현실 정치의 괴리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전남 화순군 능주에 유배된 조광조는 1519년(중종14)12월 16일 중종은 조광조를 사사를 명한다.

20일 중종이 보낸 금부도사 유엄이 현지에 도착했다.

조광조는 임금께서 신하에게 죽음을 주시면서 죄명이 있음이 합당하니 이를 청하 건데 공손히 듣고 죽겠노라 고 했으나 사사의 명만 있었고 사사의 문자도 없었다.

조광조는 정승의 반열에 있던 사람을 이렇게 허술하게 죽이니 그 폐단이 근심된다. 고 하면서 간악한 자들이 미운 자를 제 마음대로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한탄하며 뜰로 내려와 앉아서 북쪽을 항해 두 번 절하고 꿇어앉아 명을 받았다.

임금의 옥체는 어떠하신가. 도 묻고 당시 조정의 삼공육경·대간·시종이 누구인가? 를 유엄에게 물었고 대답을 듣고는 자기의 죽음이 이들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영의정은 김전, 우의정은 이유청, 좌의정은 남곤였다.

도사 유엄이 죽음을 재촉하자 조광조는 탄식하며 옛사람은 조서를 안고 엎드려 통곡함도 있거늘, 그대는 어이 그리도 다른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 절명시를 썼다.

약을 마셨으나 절명하지 않으니 군졸이 목을 조르려 하자 조광조는 임금도 신하의 목을 보존코자 하거늘 너희는 어찌 이러한고? 하며 꾸짖고 독주를 가져오라고 하여 마신후 피를 토하고 종명했다.

이듬해 봄 용인 심고리의 선산에 시신을 옮겨 안장 하였다.

중종재임중이 아닌 인종원년1545년 조광조의 관작이 회복 (사면복권)되엤다.

사대사화로 인재의 씨가 없어지고 당쟁으로 정국이 난행하고 임진란·병자란·조선조의 멸망을 자초한 처참하고 치욕의 역사를 반복했다.

'역사를 잊는 민족은 멸망한다'는 처칠경의 명언이 새로워진다.

피서로 사무실에 나와 이상정교수의 저서 '조광조'를 읽고 일부분을 요약해 보았다.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