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골을 오싹하게 한 서류분실 사건

가재산의 삶의 이야기
등골을 오싹하게 한 서류분실 사건
- 가재산 핸드폰책쓰기협회 회장
  • 입력 : 2021. 09.28(화) 19:51
  • 가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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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산 핸드폰책쓰기협회 회장
[가재산의 삶의 이야기/CTN]살다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사고를 당하거나 평생가는 트라우마를 한 번쯤 경험해본다.

나도 그런 평생 잊지못할 악몽의 일주일이 있었다. 지금껏 그토록 초긴장으로 초조했던 순간은 없었다.

나는 운 좋게 30대 초반 나이에 일본 주재원 생활을 했다. 일본에 거주하며 보고 들으며 직간접 배웠던 경험들이 직장생활은 물론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80년대에는 일본이 지금의 중국처럼 미국과 자웅을 겨루며 세계 시장을 쥐락펴락할 때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배우는 것들이 많았다. 그 당시만 해도 일본은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제도나 문화도 우리보다 앞선 게 꽤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부러운 것은 정직하고 예의 바르며, 절대 남한테 피해주지 않는 문화였다.

나는 4년간 일본 주재원을 마치고 87년도에 귀국했다.

마침 본사에 주요 부서에 해당하는 경리과장을 맡아 가끔 해외에 나갈 기회가 있었다.

일본어 구사가 웬만큼 되다 보니 일본지역 출장이 유독 많았다.

'88 올림픽'이 열리던 봄, 일본에 출장 갈 일이 생겼다.

일정을 마친 뒤 귀국 전 동경에 있는 일본 본사에 인사차 들렀다.

마침 그곳에 내가 사원일 때 과장님으로 모셨던 관리부장님이 일본본사 관리를 총괄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부장님과 시내에서 점심 식사를 같이했다. 부장님은 그 자리에서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며 이렇게 전했다.

"이 서류는 아주 중요한 거야. 그러니 서울에 가자마자 관리부장에게 직접 전달해 주시게."

"네 잘 알겠습니다. 이상 없이 잘 전달하겠습니다."라고 하고 택시를 잡아타고 도심공항 터미널로 향했다.

아뿔사 이게 웬일인가. 그 중요하다는 서류를 그만 택시에 놓은 채 내려 버렸다.

양손에 짐가방 두개를 챙기고 막 발길을 떼려는 순간 그때서야 놓고 내린 서류봉투 생각이 났다.

평소에는 택시 영수증을 잘 챙기던 내가 그날따라 영수증조차 받지 않았다.

이미 내시야에서 멀리 사라진 택시 기사와 연락할 길이 막막했다. 하늘이 갑자기 노래졌다.

서울 가는 마지막 비행기 탑승시각이 3시간 전이었다. 큰일이었다. 그렇다고 잃어버린 서류를 찾겠노라고 본사에 출장 연기 신청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일본 말이 어느 정도 되는 것이 불행중 다행이었다.

황급히 동경 에어터미널의 분실물 센터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하고 분실물 신고서에 서울 연락처와 주소를 남기고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 안에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야말로 대본 없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중요하다는 서류가 대체 무엇이었을까. 만일 세무 관련 서류라면 그 서류가 일본 국세청 손에 들어가 국제적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

온갖 걱정과 초초함에 등허리에 식은 땀까지 흠뻑 배어 날 정도였다.

별의별 생각으로 만리장성을 쌓는 사이 어느새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다음 날 출근을 하려니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출근하자마자 부장님이 잃어버린 그 서류를 찾는다면 무슨 말로 궁지에서 벗어나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천만 다행히도 부장님께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했는데 서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일단순간을 모면했지만 하시라도 내게 다가와 그 서류를 찾을까 봐 안절부절못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날은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서류를 잃어버렸다는 말도 못한 채 퇴근했다.

그 다음 날에는 '출근하자 마자 이실직고를 해야지'하고 마음먹었지만 도저히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미 동경 부장님이 우리 부장님한테 이야기한 걸 잠시 깜박 잊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착각 속에 번뇌의 이틀째가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용기가 안 나 그 주 목요일까지도 보고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다음 주까지 미룰 수는 없었다.

힘겹게 견디다 마지노선이라 생각하던 금요일이 되었다.

그날은 어쩔 수 없이 창피함과 체면 따위 다 버리고 솔직히 말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사무실에 출근하자 부장님이 신문을 보다가 오늘따라 먼저 아침 인사를 내게 건넸다.

손가방을 내려놓고 이때다 싶어 이실직고를 하려고 막 돌아서려는데 책상 위에 웬 DHL 서류 봉투가 눈에 확 들어왔다.

혹시나 해서 그 소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발신지가 일본 동경이었다. 아니, 내가 잃어버렸던 그 서류가 턱하니 내 책상 위에 놓인 게 아닌가! 나는 순간 그 국제 소포를 보며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사실 나는 그 서류를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혹시나 해서 일본의 분실물 센터에 수신지인 서울 주소만 덜렁 남겨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일주일도 안 걸려 서류가 내게 돌아오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시치미를 딱 떼고 부장님께 서류를 전하며 "아 참, 동경에서 가져온 서류를 전해 드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죄송합니다. 부장님."

천만다행으로 동경의 부장님이 우리 부장님한테 전화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간 지옥과 천당을 수도 없이 오간 기분이었다.

몇 날 밤 잠을 설치고 악몽을 꾸기도 했다.

일주일 사이에 체중이 몇 키로 정도 줄어든 느낌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와 비슷한 악몽을 꾼다. 그 서류 사건이야말로 일생일대 최고의 긴장과 초조함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일본에서는 어릴 적부터 남한테 피해 주지 않는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 예로 지하철에서 한 어머니가 어린 아들이 남의 발등을 밟고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그 아들을 심하게 꾸짖는 장면이 신문에 날 정도였다.

대개의 일본 부모들은 아이가 어릴 때부터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말인 '메이와꾸오가께나이(めいわくをかけない)'를 입에 달고산다. 만약 남한테 피해를 주었다면 곧바로 이 말로 훈육한다.

그들의 남을 배려하고 정직한 국민성 덕분에 잃어버린 서류가 타국에까지 전달되었지 않았나 싶었다. 그리고 행운이었다.

그렇듯 선진국은 무언가 다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메모 쪽지만 하나 덜렁 남겼는데 어떻게 국제소포로 내게 전달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내 서류분실 사건처럼 우리나라에서 어떤 외국인이 중요한 서류나 물건 등을 분실한다면 어떻게 처리할까? 일본에서 겪은 특별한 경험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지금까지 나는 그 서류 분실 사건을 누군가에게 한 번도 밝힌 일이 없다. 웬지 창피하기도 하고 숨기고 싶은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선진국이 되려면 정직하고 바르게 살며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문화나 의식 수준도 중요하다.

타인에 대한 작은 친절과 배려는 그 나라 문화 수준의 척도이기도 하다. 지금도 40여 년 전 그때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며 모골이 송연해진다.

가금현 기자 ggh7000@hanmail.net
가금현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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